대장군 한신
서한의 개국공신 한신(韓信 기원전 231-196)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의 하나로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 400년의 기틀을 다졌다. 한신의 소년시절 이야기는 인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예로 자주 회자된다. 소년시절 한신은 가정형편이 몹시 어려웠지만 무술을 익혔고 늘 보검(寶劍)을 차고 다녔다. 고향 회음(淮陰)에서 백정인 한 젊은이가 한신을 비웃으면서 “너는 비록 체격이 건장하지만 겁쟁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또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네가 만약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보검으로 나를 베거라. 만약 나를 베지 못한다면 내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야 한다”라며 그를 모욕했다. 한신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굽혀 그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갔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한신을 비웃으며 그를 겁쟁이라고 여겼다.
진(秦)나라 말기 천하가 큰 혼란에 빠졌다. 한신은 당시 가장 강성했던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우(項羽)에게 투신했으나 항우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신은 그보다 세력이 미약했던 한(漢)나라 왕 유방에게 투신했다. 당시 유방의 군수물자를 관리하던 소하(蕭何)는 한신의 재주와 학식을 높이 평가해 여러 차례 그를 천거했지만 유방 역시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한신이 유방을 떠나려 했다. 소하가 이 소식을 듣고는 유방에게 보고할 겨를도 없이 달밤에 한신을 쫓아가 데려왔다. 소하는 유방에게 “한신은 나라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입니다. 대왕께서 만약 평생 한나라의 왕으로 머물고자 하신다면 한신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만약 천하를 얻으려 하신다면 한신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라고 말했다.
마침내 유방은 성대한 예절을 갖춰 한신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한신은 항우의 두 가지 결점에 대해 “필부(匹夫)의 용기와 아녀자의 인정”이라고 요약했다. 또 정치•군사적으로 체계적인 계획을 마련해 유방에게 제출했다.
유방은 한신의 전략을 써서 “잔도(棧道)를 수리한다는 구실로 진창(陳倉)을 건너” 과거 전국시기 진(秦)나라 땅을 차지했다. 뒤이어 한신은 위왕(魏王) 표(豹)를 포로로 잡고 조왕(趙王) 헐(歇)을 나포했으며 북방으로 진격해서는 연(燕)나라를 평정하고 동쪽으로는 제(齊)나라를 평정했다. 마지막으로 해하(垓下)전투에서 10겹에 걸친 매복(埋伏)과 사면초가(四面楚歌)를 이용해 항우의 기세를 꺾고 그가 오강(烏江)에서 스스로 목을 베 자결하게 했다. <사기(史記)>에서는 한신에 대해 나라에 필적할 사람이 없고 공이 천하를 덮었다고 평가했다. 또 유방이 한신을 두고 “비록 백만의 군대일지라도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취한다”라고 칭찬했다고 기록돼 있다.
한신은 또 아주 충성스런 인물이었다. 한신이 제나라를 정복하자, 그에게 유방을 버리고 제나라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라고 권고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신은 “한왕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아주 깊다. 자신의 수레에 나를 태워주었고 자신이 입던 옷을 내게 입게 했으며 자신이 먹던 밥을 내게 먹게 했다. 내가 들으니 남의 수레에 탄 사람은 그의 우환을 덜어주어야 하고 남의 옷을 입은 사람은 그의 근심을 해결해주어야 하며 남의 밥을 먹은 사람은 그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 내 어찌 이익을 위해 도의(道義)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한신은 또 아주 흉금이 넓은 사람이었다. 초왕(楚王)에 봉해져 금의환향한 후 그는 소년시절 자신을 모욕했던 백정을 찾았다. 한신은 그를 복수로 죽이지 않고 오히려 초나라의 중위(中尉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직책)로 발탁했다.
한신은 또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년시절 늘 끼니를 거르곤 했는데 강가에서 빨래하던 한 아낙이 수십일 간 밥을 나눠준 적이 있었다. 한신은 고향에 돌아온 후 천근의 황금으로 그녀의 은덕에 보답했다.
한신은 또 천명(天命)을 알고 이를 따른 인물이었다. 한번은 유방이 그에게 “짐과 같은 사람은 얼마의 병력을 거느릴 수 있는가?”라고 묻자 한신은 “10만 정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유방이 “그럼 그대는 어떠한가?”라고 묻자 한신은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라고 대답했다. 유방이 “그대가 기왕 그렇게 큰 재주가 있다면 왜 나의 신하가 되었는가?”라고 묻자 한신은 “폐하의 이 자리는 하늘이 주신 것으로 사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신은 “용기와 지략이 황제를 두렵게 할 정도였고 공이 천하를 덮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방과 왕후인 여후(呂后)의 시기를 받았다. 결국 여후는 한신에게 모반죄를 뒤집어 씌워 장락궁(長樂宮)에서 살해한 후 그의 3족까지 멸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억울한 죽음의 하나이다.
션윈무용극 ‘한신’은 바로 이 역사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2011년 8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