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나쁜 사람, '미친' 사람
중국 역사에는 영웅과 간신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용맹스러운 남송의 명장 악비와 간신 진회, 그리고 도술을 부리는 미친 승려 이야기가 있다.
남송의 재상 진회(秦檜)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경멸받는 인물이다. 900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아침 펄펄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신세가 됐다. 중국인들이 죽과 함께 아침식사로 즐겨먹는 튀김요리 요우자구이(油炸鬼)는 바로 ‘진회를 기름에 튀긴다’는 뜻이다. 하지만 튀김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다.
중국 남부의 아름다운 강 서호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악비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악비가 묻힌 무덤 앞에는 진회 부부의 철상이 세워져 있다. 철상은 무릎을 꿇고 손은 등 뒤에서 포승줄에 묶인 형상을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철상에 침을 뱉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악비의 충정
북송 말기였던 12세기, 중국은 북방 여진족의 침략을 받았다. 당시 쇠약해진 조정은 힘 있는 군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악비는 출중한 인물이었다. 특별한 무술을 연마한 그는 240보(약 180m) 밖에서 화살 9발을 한꺼번에 쏘아 소의 눈알을 명중시킬 정도로 뛰어난 활솜씨를 갖췄다. 하지만 조정에서 병사를 모을 때 악비는 딜레마에 빠졌다. 외적을 물리쳐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다른 한편, 집에 남아 연로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도 싶었다. 충과 효는 옛 중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던 덕목이었고, 악비는 바로 충돌하는 두 가치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다.
이런 악비를 본 노모는 웃옷을 벗게 하고 그의 등에 ‘온 힘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정충보국(精忠報國)’이란 네 글자를 새겨주었다. 어머니의 뜻을 따르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악비는 즉시 전쟁터로 떠났다.
이후 악비는 백전불패의 전공을 세우면서 송나라의 가장 위대한 장군이 됐다. 한 번은 기마병 500명으로 여진족 10만 명을 대파하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악비 장군은 병사들을 아꼈다. 병사들이 병이 들거나 부상을 당하면 직접 상처를 치료해줬고, 사망한 병사의 가족들을 돌봐줬다. 하지만 병사들의 행동은 아주 엄하게 단속했다.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약탈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로 인해 악비는 중국 역사에서 충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하지만 악비의 명성을 시기하는 이들이 있었다.
진회의 모함
1127년 여진족이 북송의 수도인 변량(汴梁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와 신하, 시종 등 모두 1만 4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중에는 대신 진회도 있었다. 포로들은 모두 걸어서 만주로 압송됐다. 한편, 황제의 동생(훗날 고종)은 남쪽으로 도망쳤고, 양쯔강을 건너 남송을 건립했다.
몇 년 후 진회가 갑자기 남송의 수도에 나타났고, 자신이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했다며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진회가 여진족이 보낸 첩자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새로 황제에 오른 고종은 진회를 신임했고, 그를 재상에 임명했다.
곧이어 진회는 여진족과 화친을 맺도록 고종을 설득했으며, 그 결과 남송을 여진족의 조공국으로 전락시키는 조약이 맺어졌다.
이때에 이르러 진회는 악비 장군의 명성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진회는 악비 장군이 반란을 꾀한다고 모함했고, 이 말을 믿은 고종은 전쟁터에 있던 악비 장군에게 조정으로 돌아오라는 소환 명령을 내렸다.
악비 장군과 그의 부하들은 이것이 음모임을 알아 차렸다. 병사들은 악비 장군에게 조정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충직한 악비 장군은 신하의 도리를 다 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황제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조정에 돌아온 악비는 군사지휘권을 박탈당했고, 자신이 지켜냈던 전선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이 때 악비는 “십년 노력이 하루아침에 끝났다”라며 탄식한다. 진회와 그의 부인은 수개월에 걸친 심문과 고문에도 악비로부터 어떤 자백도 받아내지 못하자 그를 처형 시켜버렸다.
‘미친’ 승려
악비의 죽음이 온 나라에 알려지자 악비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반면 진회는 가장 경멸받는 사람이 됐다.
어느 날 진회 부부는 점을 치기 위해 영은사(靈隱寺)를 찾았다. 부부는 복이 가득할 것이라는 치렛말 정도를 들으러 간 것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빗자루로 얼굴을 맞는 봉변을 당했다. 실은 한 현자가 미친 승려로 변해 도술을 써서 부부를 쓸어낸 것이었다.
이때부터 진회가 보응을 받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침을 뱉는 타구로 쓰이거나 매일 아침 펄펄 끓는 기름에 튀겨지는 신세가 된 것이다.
2014년 2월 16일